진정한 한국현대미술 (contemporary art of korea)
화가 김만수 작가 스토리
written by Y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70년경이다.
나는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기에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고향인 제주도 서귀포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상경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고향인 제주도를 가기 위해 부산에 들렀다가 스승인 화가 송혜수 선생님을 만나면서 소설가의 꿈을 접고 외롭고 힘든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송혜수 선생님은 원래 평양 분이셨는데 6.25때 부산으로 피난을 오셨다. 장로 집안의 아들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셨고 일본 동경제국 미술학교를 장욱진 선생님과 함께 다니셨다. 장욱진 선생님이 서울에서 나를 만나면 “네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실력이 최고이니 잘 모셔라”고 항상 말씀하실 정도로 그 당시 송혜수선생은 실력이 최고였고 내가 양아들로 있기를 바라셔서 그 분의 아틀리에를 운영하면서 미술의 기초를 쌓았다.
스승은 내가 대학에 가면 큰 화가가 안 된다고 하시면서 대학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다. 그리고 그 당시 먹고 살기 위해 신문사에 취직 했는데 큰 그림을 못 그린다고 야단을 치셔서 힘들게 들어간 신문사도 그만 두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감각 공부를 하였다. 미 문화원을 3년 넘게 다니면서 매일 외국의 미술, 건축, 사진 등 가리지 않고 보면서 감각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미 문화원에 불이 나면서 출입이 자유롭지 않게 되어 그만 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시절부터 우리나라 고미술에 관심을 갖고 그쪽 컬렉터분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우리나라 고미술에 대해서도 미적감각을 키웠다. 특히 우리 민화와 백자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내 나이 때에 골동가게에 가는 미술학도는 거의 없었다. 서양미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양화를 배우면서 3년 만에 내가 깨달은 것 “못 그리는 게 내 공부”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그림의 3대요소로 하나는 힘, 기, 저력이고 하나는 회화성이고 마지막 하나가 테크닉(기교)이라 생각했다.
그림을 열이라는 숫자로 봤을 때 테크닉(기교)이 차지하는 부분은 한 둘이고 회화성은 두 세개이고 나머지 부분이 힘, 기, 저력이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1980년 후반 경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바로 “주체적인 서양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프랑스에 가보니 한국미술의 정체성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 미술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 대가의 그림을 서양에서는 자기네 그림의 아류가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그때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서양화 붓을 꺾고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1980년대 후반 겸재 정선의 그림을 내 나름대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린 게 山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파트 문화였기 때문에 colour가 없으니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동양화는 서양에서 볼 때는 중국 그림으로 보고, 외국에서 동양화가지고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우리의 민화였다.
한국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있는 미적감성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선을 연구했고 우리 민족 고유의 색과 감성을 나타내려고 무던히 애써서 오늘날과 같은 작품들이 완성 되었다.
젊은 시절 나는 데상도 최고 실력이었고 내 스승은 장욱진 선생이 최고 실력자라고 인정한 스승이었다. 그 스승 밑에서 수제자로 있었다.
내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누구 보다 빨리 그릴 수 있다. 누가 나의 옛날 작품을 보고 외국의 대가 그림 같다고 했다. 내가 현대적인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그림을 그려야겠다 생각하고 25년 전에 붓을 꺾었다. 이제 25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이뤄냈고 외국에 나가서도 우리 한국 미술이 이것이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바탕도 그렇고, 선도 그렇고, 자를 대지 않고 그리는 그림이다. 우리의 미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우리 민족의 막사발과 달항아리 같은 자연미다
나의 100호 이상되는 작품들은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다. 소품을 확대한 그런 작품이 아니다.
내 그림이 쉬워 보이지만 바늘 끝 하나라도 마음에 들 때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그만큼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에 뭔가 모르게 끌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 작품이 민화를 재창조 했다고들 한다. 물론 초반에는 민화의 영향도 많이 받고 그 소재를 그리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정물장생도(화평도)는 한국에도 없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새로운 쟝르의 그림이다
그것은 외국의 쾰른아트페어.아르코아트페어,상해아트페어,홍콩아트페어,싱가폴 아트페어등 외국아트페어에 참여하면서 더욱 확신을 가졌다.
미국에서는 내 그림이 한 획을 그었다고 해서 아트비자(O1비자)까지 내 주었다. 그 비자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비자다.기간 상관없이내가 미국에 머물러 있고 싶은만큼 있을 수 있는 비자이다.
아트비자를 받고 미국에 진출했지만 나는 또다른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미국 도착해서 3일 만에 지인의 소개로 중국계 미국인인 양각용 박사의 저녁초대를 받았는데 뜻하지 않은 제의를 받았다. 그분은 백인회라는 단체의 상임고문이셨는데 내 작품을 그 단체에서 초대전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으니 자기 회원 중에 음악가로는 요요마가 있고 건축가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엠 페이가 있고 IT분야에서는 빌 게이츠같은 제리양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전 미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중국 자국민을 살려낼 정도로 미국에서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단체라고 소개하시며 내 작품이 가장 동양적이니 미국이라는 서양에서 제대로 된 동양미술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뜻 대답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국인의 도움으로 이 미술을 알리고 싶었다.
친구가 뉴욕 총영사도 소개시켜준 상황이라 한국인도 아직 아무도 안 만난 상황에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나중에 아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로 닥터 양은 자기 평생에 다른 사람에게 No 라는 대답을 들어 본적이 없었는데 내가 거절 한 줄 알고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3개월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나는 뼈아픈 경험들을 했다.뉴욕 총영사도 한국 문화원도 코리아 소사이어티 한국 직원들도 내 그림에는 관심도 없었고 전시 하자는 요청도 없었다.
7,8년전에도 중국화랑에서 70∼80평되는 작업실을 내어줄 테니 작업하러 들어오라고 했지만 애국심 때문에 오케이 하지 않았다.
그 화랑 주인은 프랑스 샬롱 협회 회장도 했었고 부인은 평론가이며 그 당시 피카소 그림을 3점이나 판 화랑이고 2000만원이하 작품은 팔지 않는 화랑이라고 했다. 내가 1년 동안 오케이 하지 않으니깐 한국말 하는사람을 한국까지 보내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러브콜을 했다. 그 증인이 골프헤럴드 잡지 이순숙 사장이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뒤로 하고 한국 미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했다.
만약 내가 중국에서 작업하고 세계에 내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면 이 그림은 중국 미술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돈 벌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제대로 알아 주신 분은 김진선 대장 뿐이었다. 그 분도 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애국인이었기에 그림은 잘 모르지만 나의 모든 말을 믿어 주고 인정해주셨다.
나는 스스로를 독립군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후원자가 있어야 될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 힘을 받아야 외국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세계에 없는 새로운 쟝르의 그림을 만들었다. 오천 년 전 부터 이어온 한국의 미감을 100년 만에 부활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전 세계에 새로운 미감을 알려주는 차원에서 나는 인류애라 생각한다.
나의 작지만 큰 꿈은 미술학교를 세워서 잃어버린 우리 민족 고유의 감성을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25년이 지나간 이 시점까지도 이것의 중요성과 뼈 아픔을 나 만큼 느끼는 사람도 지원자도 없어서 이제는 접어야 될 것 같다. 내 나이 60이 넘어가니 기력도 의욕도 상실해 버렸다.
인사동에서 미술학교를 할려고 했던 것은 우리의 미감들을 그만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우리 정서구나, 우리 미적 감각이구나!”하고 내가 기초를 세우면 후배들이 거기에 덧붙여서 한국적인 세계화를 만들기를 바랬다.
나는 힘들지만 밀알이 되고 싶었다.
요즘 민화를 소재로 그리는 젊은 작가들이 많은데 내용이 없는 그림들이 많다. 내공이 없는 그림들이다. 소재를 빼면 서양그림이다
돌아가신 최정기(전경련 부본부장)선생이 나에게 “당신같이 내공있는 자가 이 나라의 한국 미술을 이끌어줘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지만 나의 작품을 외국에 알리려는 이유는 이렇게 안 보여주면 그들이 요즘 젊은 작가들의 민화작품을 보면서 한국적인 것도 있지만 퓨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우리 그림으로 보지 않고 위성국가처럼 자기들 문화의 종속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나 만큼 이렇게 치열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나올 수 있을지...